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단 편집) ==== 방어전 회피 ==== '''여몽전쟁 30년 동안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들어가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일말의 군사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의 [[군사분계선]]에 해당하는 [[북계]] 방어선을 스스로 포기하여 국토와 국민을 무방비 상태로 외침에 노출시켰으며 중간 중간에 몽골 침공이 없는 휴식기가 이어졌음에도 육지로 나와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적군이 쳐들어왔을때 방어군조차 제대로 파견하지 않았다. '''여몽전쟁 30년 동안 확인되는 총 56회의 전투[*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20_0030_0010_0030_0040_005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온수현%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온수현%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온수현%27%7C1%7C0%29+%7D]] ] 중 야별초(夜別抄)[* 무신정권의 군대로 그 당시 고려의 유일한 정규군이었다. 일반 별초와 구분된다. 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별초와 야별초' 항목 참조.]가 몽골군을 상대로 기록한 교전 횟수는 고작 5차례'''로서 3차 침입때와 9차 침입때 각각 3차례와 2차례의 교전 횟수를 기록하여 거의 활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야별초의 교전 횟수 뿐만 아니라 몽골군을 상대로 교전한 야별초의 병력 규모다. 무신정권은 두 차례의 교전에서 고작 '''160~200명'''의 야별초 대원만을 내보냈을 뿐이다. 나머지 세 차례의 교전도 야별초가 현지 주민들을 규합하여 척후병 또는 본대와 뒤처진 소규모 몽골군을 방어하는 형태의 일회성 작전으로 전개되어 그 규모가 미미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전들은 모두 정부의 명령을 하달받은 지휘관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 후방 지원을 받으며 몽골군 주력을 섬멸하는 조직적 군사 작전이 아니라 지휘관 개인 또는 부대원들의 자발적 의지와 판단에 의한 일회성 군사 시위였다. 여몽전쟁 동안 야별초가 몽골군을 상대한 총 5차례의 교전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몽골의 3차 침입(1235년 7월 ~ 1239년 4월)''' >최우(崔瑀) 도방(都房)이며 야별초도령(夜別抄都領)인 이유정(李裕貞)이 적과 싸우겠다고 자청하자 병사 160인을 주어 파견하였다. > >ㅡ 1235년 8월 21일 ㅡ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이임수(李林壽)와 박인걸(朴仁傑)이 각각 100여 인을 이끌고 나뉘어서 몽고군 진영으로 향하였다. > >ㅡ 1235년 8월 25일 ㅡ 보다시피 정부 수뇌부의 의사가 아닌 일개 지휘관들의 자발적 자원 요청으로 고작 160~200명의 군사를 내보내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통해 병력을 내보내게 된 원인이 무신정부 수뇌부와 지휘관들 사이의 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기록은 이유정과 그를 따르는 병력이 모두 전멸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박인걸과 이임수 역시 별다른 기록 없이 전사자들을 내었다는 기록을 통해 이들의 작전이 실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유정(李裕貞) 등이 해평(海平, 경상북도 구미)에서 몽고군과 싸웠으나 패전하여 군사가 모두 죽었다. > >ㅡ 1235년 9월 ㅡ >박인걸(朴仁傑) 등이 공주(公州) 효가동(孝加洞, 충남 공주시 소학동)에서 몽고군과 마주쳐서 싸웠는데 16인이 전사하였다. > >ㅡ 1236년 12월 ㅡ 반면 지평현 전투는 정부군이 지역민들의 힘을 빌려 승전할 수 있었는데 단순히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라고만 나와 있고 그 구체적인 교전 규모는 나와있지 않다. >야별초(夜別抄)가 지평현(砥平縣, 경기도 양평) 사람들과 함께 밤에 몽고군을 공격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으며 말과 나귀를 노획하여 돌아와 조정에 바쳤다. > >ㅡ 1235 10월 ㅡ 분명한 것은 이후 몽고군이 3년여간 전국을 휘젓고 다니며 국토를 유린하는 것으로 보아 상기한 전투가 고려를 쳐들어온 몽골 주력 병력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1238년에는 몽고군이 [[경주시|경주]] 지역까지 이르게 되어 [[황룡사]]는 이때 몽고군에게 파괴된다. >몽고군이 의주강(義州江)을 건너 오물지천(烏勿只川) 및 삭녕진(朔寧鎭)에 주둔하고, 유격병(遊擊兵)이 가주(嘉州) 및 안북부(安北府)의 운암역(雲岩驛)에 주둔하였다. 가주와 박주(博州) 사이에서 불길이 하늘에 닿았다. 또 선주(宣州)의 형제산(兄弟山) 들판 17곳에 나누어 주둔하였고, 마침내 자주(慈州)·삭주(朔州)·구주(龜州)·곽주(郭州)의 사이에 두루 퍼졌다. 선봉은 황주(黃州)에 들어가 신주(信州)·안주(安州)의 두 주에 이르렀다. > >ㅡ 1236년 6월 ㅡ >몽고군이 동경(東京, 경주)에 이르러 황룡사탑(黃龍寺塔)을 불태웠다. > >ㅡ 1238년 윤4월 ㅡ '''몽골의 9차 침입(1258년 4월 ~ 1259년 3월)''' 다음은 9차 몽골 침략때 정부군이 활약한 기록이다. >몽고군의 척후병 1,000기(騎)가 수안(遂安, 황해도 수안군)으로 들어왔다. 야별초(夜別抄)를 보내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禦之) > >ㅡ 1258 4월 ㅡ >몽고군이 성주(成州) 기암성(岐巖城, 평안남도 성천)을 공격하였는데, 야별초(夜別抄)가 성 안의 사람들을 이끌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 >ㅡ 1259 1월 ㅡ >등주(登州)·화주(和州) 등의 여러 성의 반란한 백성이 관인(官人, 몽골인)을 자칭하고 몽고인을 인도해 와서 한계성(寒溪城)을 공격하였다.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夜別抄)를 이끌고 출격하여 섬멸하였다. > >ㅡ 1259 2월 ㅡ 상기한 전투들 역시 그 교전 규모나 양상, 피해 상황 등은 나와 있지 않고 단순히 '이겼다.', '섬멸하였다.'라고만 나와있을 뿐이다. 특히 첫번째 기사는 '방어하게 하였다.(禦之)'라고만 되어 있어 실제 교전이 일어났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한계성 전투에서 정부군이 상대한 적군은 그 주축이 몽고군이 아닌 고려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어 내전 양상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교전이 있고난 후에도 어김없이 몽고군이 전국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통해 상기한 교전들 역시 몽골 주력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몽고군이 착량(窄梁)에서부터 와서 갑곶강(甲串江, 강화 해협) 밖에 진을 치고 온 산과 들을 에워쌌다. > >ㅡ 1258년 9월 ㅡ >이 해에 전국의 곡식이 모두 몽고군에게 약탈되었다. > >ㅡ 1258년 미상 ㅡ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보고하기를, “몽고 척후기병이 서경(西京, 평양)을 지나갔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도성(京城)에 계엄을 내렸다. > >ㅡ 1258년 6월 ㅡ >서경(西京)에 주둔하던 몽고군(蒙兵)이 청송현(靑松縣)·안악군(安獄郡)·풍주(豊州)·해주(海州)에 함부로 들이닥쳐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여 갔다. > >ㅡ 1259년 7월 ㅡ 이상이 여몽전쟁 30년동안 정부군이 몽고군을 상대로 기록한 전투 내용의 전부다. '''고작 5회의 소규모 교전에서 3번의 승전을 기록했으며 그 중 하나는 고려 난민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마저도 '''지휘관 개인이나 부대의 자의적 의사에 의한 것으로서 일회성 작전 후에는 어김없이 전국이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처럼 최씨정권은 정부군을 파견하여 단 한 차례의 방어전도 감행하지 않았는데 그들로서는 권력을 담보받을 수 있는 최상의 조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사실은 최씨정권이 몽골로부터 그렇게 안전을 담보받고 있는 동안 내지의 백성들은 곳곳에서 죽어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육지에 주력 병력을 파견하면 강화도의 방비가 뚫리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섬에만 갇혀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시도에 불과하기에, 국경을 스스로 포기하여 전국을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한 최씨 정권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씨정권 휘하에는 침략군을 저지할만한 충분한 병력이 있었음에도 [* 이 시기 고려 정부의 병력에 관해서는 본 문서의 '강화도 파천 시절 고려 정부의 병력' 참조], 단 한 차례도 병력을 파견해 방어전을 펼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국가 안보를 팔아먹은 매국행위로서 욕먹어 마땅하다. 설사 병력이 부족했다 하더라도 병사들을 모집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여 외침으로부터 국토와 국민을 수호하는게 정부가 해야할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국민을 수호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정부에 과연 군대가 존재할 이유가 있을지 따져볼 문제다. 외적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지 못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정권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은 계속 거두어들이고 있었다는거 자체가 이미 국가를 팔아먹은 매국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